주앙 2세 (포르투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앙 2세는 1481년부터 1495년까지 포르투갈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으며, 탐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하고 브라질을 발견하는 등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을 이끌었다. 또한, 스페인과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식민지 분할의 기준을 마련했다. 유대인 정책과 관련해서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조건부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는 "완벽한 왕자"로 불리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업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95년 사망 - 이극배
이극배는 조선 초 문신으로, 문과 급제 후 세조의 총애를 받아 추충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조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 1495년 사망 - 프랑수아 드 방돔 백작
프랑수아 드 방돔 백작은 카페 왕조의 일원으로, 방돔 백작위를 계승하여 마리 드 룩셈부르크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25세에 사망하고 장남 샤를 4세가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 1455년 출생 - 폐비 윤씨
조선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는 질투심과 후궁을 해하려 했다는 의혹 등으로 폐위되어 사사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455년 출생 - 김응기
김응기는 조선 시대 문신으로, 문과 급제 후 예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재등용되어 요직을 거치고 1519년에 사망하여 시호는 문대이다. - 아비스가 - 엔히크 항해왕자
엔히크 항해왕자는 포르투갈의 왕자로서 아프리카 해안 탐험을 후원하고 항해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으나, 1460년에 사망했다. - 아비스가 - 마누엘 1세 (포르투갈)
마누엘 1세는 1495년부터 1521년까지 포르투갈을 통치한 왕으로, 중앙 집권화와 해상 무역로 개척을 통해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마누엘 양식을 발전시키고 유대인 정책을 펼쳤다.
주앙 2세 (포르투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주앙 2세 |
포르투갈어 | João II |
호칭 | 완벽왕 |
로마자 표기 | Joao II |
왕위 | |
작위 | 포르투갈 국왕 |
재위 (첫 번째) | 1477년 11월 10일 – 1477년 11월 14일 |
즉위 유형 (첫 번째) | 옹립 |
즉위일 (첫 번째) | 1477년 11월 10일, 산타렝 |
선임자 (첫 번째) | 아폰수 5세 |
후임자 (첫 번째) | 아폰수 5세 |
재위 | 1481년 8월 28일 – 1495년 10월 25일 |
즉위 유형 | 옹립 |
즉위일 | 1481년 8월 31일, 신트라 |
선임자 | 아폰수 5세 |
후임자 | 마누엘 1세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455년 3월 3일 |
출생지 | 상조르즈 성, 포르투갈 왕국 |
사망일 | 1495년 10월 25일 |
사망지 | 알보르, 알가르브 왕국 |
매장지 | 바탈랴 수도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비제우의 레오노르 (1470년 결혼) |
자녀 | 아폰수, 포르투갈 왕세자 사생아: 조르제 드 렝카스트르 |
왕가 | 아비스 가 |
왕조 | 아비스 왕조 |
아버지 | 아폰수 5세 |
어머니 | 이사벨 드 코임브라 |
2. 어린 시절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폰수 5세와 어머니 코임브라의 이사벨 사이에서 세번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첫째 형은 유아기에 바로 사망하였기에 사실상 장남으로 성장하였다. 부왕 아폰수 5세는 섭정기를 거치며 섭정이었던 코임브라 공작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며 친정 이후에도 대귀족들의 권력 전횡에 시달리며 의타적이고 무능한 국왕이었다.[83]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1474년 12월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고, 주앙 2세는 이 분쟁에 깊이 관여했다.
주앙 2세의 왕세자 시절은 대귀족인 브라간사 공작 가문이 강력한 권력과 부를 바탕으로 왕국의 권력을 장악한 후 실권을 행사하는 등 정국이 혼탁한 상황이었다. 브라간사 가문은 과거 1449년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정적인 코임브라 공작을 제거한 후 실질적으로 왕국의 통치자로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브라간사 공작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권력은 왕을 능가할 정도였고 왕권은 추락하여 귀족들의 눈치를 보았으며 부왕은 그들에게 특혜를 남발하였다. 이렇게 비대한 귀족권력은 차후 국왕으로 즉위할 주앙 왕세자에게는 항상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83]
왕자 시절인 1471년에 부왕 아폰수 5세가 주도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원정에 함께 참전했으며 아르질라 정복에 성공한 후 기사로 서임받았다. 1474년부터는 아프리카 무역과 탐험 업무를 위임받았다. 부왕이 국정의 일부를 넘긴 것은 카스티야 왕위 계승전쟁(1475~79)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1475년 4월에는 섭정으로 임명받았고 부왕은 전쟁에 전념하였다.[83]
1455년 5월 3일에 리스본에서 태어난 주앙은 아폰수 5세와 코임브라의 이사벨라의 둘째 아들이었다. 한 달 후인 1455년 6월 25일, 그는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고, 삼부회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1468년, 아폰수 5세와 엔리케 4세는 주앙이 엔리케의 딸인 후아나와 결혼하고, 아폰수가 엔리케의 이복동생이자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라 1세와 결혼하는 이중 결혼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이러한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주앙은 그의 사촌이자 비제우 공작 페르디난드의 장녀인 비제우의 레오노르와 1471년 1월 22일에 결혼했다.
3.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엔리케 4세 사후, 그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가 즉위했으나, 이사벨 1세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와 아폰수 5세가 결혼하면 카스티야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앙 2세는 아폰수 5세에게 후아나와 결혼하고 카스티야를 침공할 것을 권유했으나,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1세 등 주요 귀족들은 반대했다.
1475년부터 1479년까지 전쟁이 이어졌고, 주앙 2세는 알카소바스 조약(1479)을 통해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을 종식시키고 카나리아 제도 남쪽 대서양에서 포르투갈의 패권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약으로 주앙 2세의 아들 아폰수와 이사벨 1세의 장녀 이사벨라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1481년 8월 28일, 아폰수 5세가 사망하자 주앙 2세는 포르투갈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8월 31일 신트라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3. 1. 배경
1474년 12월, 이웃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가 서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후아나는 출생 당시부터 왕비의 불륜[28]으로 태어났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귀족들은 엔리케 4세가 성불구자[31][32][33]라는 증거를 바탕으로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했다.
1464년 귀족 반란이 발생하여 4년간 내전이 이어졌다. 1468년 엔리케 4세는 왕비 조안을 추방하고 혼인 무효를 선언했다.[34] 같은 해 9월,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35]을 통해 이사벨이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정략결혼 강요를 거부하고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는 협정 위반으로 이사벨의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후계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했다.
1475년,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주앙 2세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도록 부추겼다. 1475년 5월, 아폰수 5세와 주앙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로 진입했다. 아폰수 5세는 팔렌시아에서 후아나와 약혼하고 카스티야의 군주로 선포되었다.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아폰수 5세와 주앙 2세의 군대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의 카스티야 군대와 격돌했다. 전투 결과는 불확실했지만,[4][5][6]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고,[7][8][9][10] 아폰수 5세의 카스티야 왕위 획득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3. 2. 아폰수 5세의 개입과 전쟁의 경과
1474년 12월,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가 즉위했다. 하지만 이사벨 1세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면 아폰수 5세에게 카스티야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앙 2세는 아버지에게 후아나와 결혼하고 카스티야를 침공하라고 설득했지만,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1세를 포함한 주요 귀족들은 반대했다.[37] 아폰수 5세는 후아나의 지지 세력을 확인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고, 긍정적인 보고를 받자 전쟁 준비를 명령했다.[37]
1475년 5월 12일, 아폰수 5세와 주앙 2세는 기병 5,600명과 보병 14,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로 진입했다. 아폰수 5세는 팔렌시아에서 후아나를 만났고, 주앙 2세는 왕국 통치를 위해 귀국했다. 5월 25일, 후아나와 아폰수 5세는 약혼하고 카스티야의 군주로 선포되었다. 같은 달, 주앙 2세의 아내 엘레오노르는 부부의 외아들인 아폰수를 낳았다.
1475년 말, 아폰수 5세는 주앙 2세에게 증원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주앙 2세는 군대를 모아 1476년 1월 다시 카스티야로 떠났고, 엘레오노르를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1476년 3월, 토로에서 아폰수 5세와 주앙 2세는 약 8,000명의 병력으로 페르난도 2세 등이 이끄는 카스티야군과 맞섰다.[2] 아폰수 5세는 패배하고 도망쳤지만, 주앙 2세는 카스티야 우익을 격파하고 전장을 유지했다.[3] 그러나 전투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았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로 전투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게 큰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고,[7][8][9][10] 아폰수 5세의 카스티야 왕위 획득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 주앙 2세는 곧 포르투갈로 돌아와 잔여 군대를 해산했다.
한편, 해상에서는 포르투갈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었다.[38] 아폰수 5세는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1477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39]
4년간의 지리한 전쟁 끝에 양국은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했다. 카스티야는 포르투갈에게 대서양과 북아프리카 탐사, 무역에 대한 유리한 조건을 양보했고, 이사벨 1세의 왕위 계승권을 지켰다. 후아나는 수도원에 들어갔고, 아폰수 5세는 크게 실망하여 주앙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후 신트라의 수도원에서 은거하다 1481년에 사망했다.
3. 3. 알카소바스 조약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은 이사벨 1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많은 것을 얻어냈다.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카스티야의 지배권[40][41]을 제외한 양국 간에 분쟁 중인 모든 영토와 아프리카 해안에 대해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주요 지역은 기니의 광산, 마데이라, 아조레스, 케이프 베르데였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지역에 대한 독점 정복권도 따냈다.[42][43] 또한 보자도르 곶(북위 26도)을 기준으로 한 남쪽의 모든 대서양에서 항해, 정복, 지배, 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했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대서양에서 알려진 영토뿐만 아니라 미래에 발견될 영토에 대한 소유권도 획득했다. 스페인(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포르투갈의 허락 없이 포르투갈 소유지로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이후 주앙 2세의 대서양과 아프리카 탐험 사업 전개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4. 왕권 강화
아폰수 5세는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로, 브라간사 공작에게 의지하며 그와 그의 측근 귀족들에게 각종 특혜와 이권을 남발하였다. 이로 인해 귀족들은 각종 특권을 누렸고 왕권은 끝없이 추락하였다.[83] 이런 귀족들의 횡포와 비리를 지켜보며 성장한 주앙 2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국정에 참여하며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83] 1477년부터 1481년까지 주앙 2세는 아버지 아폰수 5세와 함께 "사실상 공동 통치자"였다.[1]
1481년 8월 28일 아버지가 사망하자,[2] 주앙 2세는 포르투갈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8월 31일 신트라에서 대관식을 올렸다.[3][4] 즉위 후 주앙 2세는 아버지 시대에 축적된 귀족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5][6][7]
4. 1. 귀족 세력 숙청
아폰수 5세의 지나치게 관대한 정책으로 인해 대귀족들의 힘이 과도하게 비대해져 있었다. 주앙 2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1481년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후, 종친 대귀족들을 숙청하는 개혁을 과감하게 진행하였다.[83] 우선 대귀족들이 누리던 특혜를 축소하고 특권을 제한하였다. 또한 1481년 11월에 코르테스(의회)를 소집하여 신하로서 군주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이런 일련의 조치에 대해 귀족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귀족들은 당대에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를 중심으로 반란을 획책하며 예상대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도 공모를 추진했다. 반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주앙 2세는 에보라에서 브라간사 공작을 전격적으로 체포하였다. 또한 약식재판을 통하여 반역죄를 확정 지은 후 신속히 처형을 집행하였다.(1483년 6월 20일)[48][49]

브라간사 공작에 대한 숙청이 마무리되자 주앙 2세는 귀족들이 그들의 영지 내에서 불법적으로 휘두르던 사법권에도 제재를 가했다.[50] 이에 귀족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쿠데타를 통하여 비제우 공작(1450~1484)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은밀히 진행되던 역모 계획은 발각되었으며 주앙 2세는 태연하게 비제우 공작을 세투발로 호출하였다. 공작을 대면한 자리에서 주앙 2세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비제우 공작을 죽여버렸다.(1484년 8월)[48]
주앙 1세 때부터 시작된 비제우 공작 가문은 종친이자 대귀족이었는데 국왕이 직접 이런 가문의 수장을 숙청하자 포르투갈 귀족사회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52] 브라간사 가문과 비제우 가문의 광대한 영지는 모두 몰수하였고 반란 음모에 동조한 80여 명의 귀족들도 처형하였다.[52] 아폰수 5세의 총신이었던 에보라의 주교가 역적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적발되자 그를 우물에 던져 죽여버렸다.[52] 외조부이기도 한 브라간사 공작을 숙청하고 왕비의 오빠이기도 한 비제우 공작을 직접 죽임으로써 반역자들에 대한 분노와 왕권 강화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가담 정도가 경미한 자들은 국외 추방하였고 많은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에 귀속시켰다. 대귀족의 씨를 말리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마치자 이후 감히 왕에게 반항하는 자가 없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더 이상의 역모가 발생하지 않았다.
4. 2. 중앙집권화 정책
주앙 2세는 아버지 아폰수 5세 시대에 귀족들이 축적한 권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1] 1481년 에보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여 대규모 선서식을 거행했는데, 귀족들과 다른 신하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상관으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2] 이는 동등한 사람들 중 첫 번째로 왕을 인정하는 봉건적 전통에 익숙했던 상류 귀족들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었다.[2][3] 코르테스에서 주앙 2세는 귀족들의 재산 소유권 증서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해 일괄적인 확인 대신 개별적인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여 귀족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평민 대표들이 귀족과 성직자의 부정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자, 주앙 2세는 귀족들의 영지 내 사법권을 박탈하고,[11] 대신 왕실 관리 또는 코레헤도르에게 전국을 순찰하고 사법을 집행할 권한을 부여했다.[11][12]이러한 공격적인 왕권 주장은 귀족들 사이에 분노를 불러일으켰다.[4] 1482년, 포르투갈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인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주앙 2세의 폐위를 모의하기 시작했고, 가톨릭 군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5] 주앙 2세는 페르난두 2세를 체포하여 반역죄 22건으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1483년 6월 공개적으로 참수했다.[6][7] 그 후 브라간사 가문의 자산은 몰수되었고 가족은 카스티야로 도망쳤다.[5][8]
브라간사 공작의 처형은 상류 귀족들 사이에서 더 많은 음모를 야기했고, 이들은 주앙 2세의 사촌이자 왕비 레오노르의 형제인 비제우 공작 디오구를 중심으로 결집했다.[5] 1484년 9월, 주앙 2세는 디오구를 자신의 사적인 방으로 불러 반역의 증거를 제시하고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9][5] 음모에 연루된 다른 주동자들도 박해를 받았다.[10] 궁극적으로 주앙 2세는 포르투갈의 대부분의 봉건 영주를 처형하거나 추방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왕실을 부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9][11] 그는 남은 재위 기간 동안 작위 수여를 최소한으로 유지했다.[5]
5. 탐험 사업
주앙 2세는 왕권 강화에 성공한 후, 엔히크 왕자 사후 지지부진했던 대서양과 아프리카 서안 탐험에 집중하였다. 선왕 아폰수 5세는 북아프리카 정벌에 열중했으나, 이는 포르투갈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주앙 2세는 아프리카 서안 탐험을 재개하여 교역을 늘리고 왕실 수입을 증대시켰으며, 인도 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 사업에는 협력하지 않아 대서양 개척에서는 스페인에 뒤처졌지만, 1484년에는 콩고강 어귀, 1488년에는 희망봉에 도달하는 등 아프리카 항로 개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493년 초,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돌아오던 중 폭풍을 만나 리스본 항구에 들어왔다. 주앙 2세는 콜럼버스를 환영했지만,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라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포르투갈의 영향권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휘하 함대를 준비하여 새로운 섬들을 차지하려 했다. 전쟁을 피하고자 스페인과 토르데시야스에서 협상을 진행하여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 신대륙에서 새로 발견된 땅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분할하였다.
5. 1. 아프리카 항로 개척
왕권 강화에 성공한 주앙 2세는 대서양과 아프리카 서안 탐험에 집중하였다. 선왕 아폰수 5세는 북아프리카 정벌에 열중하여 어느 정도 성과는 거두었으나, 포르투갈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 채 국력만 소모하였다. 주앙 2세는 엔히크 왕자가 사망한 1460년 이후 지지부진했던 아프리카 서안 탐험을 재개하여 그 지역과 교역을 늘려 왕실 수입을 증대시켰다. 또한 인도 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14년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엔히크 왕자에 못지않은 업적을 이루었다. 주요 탐험 업적은 다음과 같다.연도 | 내용 | 탐험가 |
---|---|---|
1481년 | 나이지리아에 상조르제 요새 건립 | 디오구 데 아삼 |
1482년 | 콩고강 발견 | 디오구 캉 |
1484년 | 산타마리아 곶 탐험 | 디오구 캉 |
1485년 | 케이프 크로스 탐험 | 디오구 캉 |
1488년 | 희망봉 발견 | 바르톨로뮤 디아스[53] |
1493년 | 상투메 섬과 프린시페 섬 정착 시작 | 알바로 카민하[54] |
주앙 2세의 지원 속에 케이프 크로스(현 나미비아 서안)까지 탐사가 이루어져 원양항해에 필요한 정보와 경험이 축적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487년 8월, 바르톨로뮤 디아스(1451~1500)가 왕명을 받아 3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항을 출발하였다.[55]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과 전설 속 프레스터 존이 다스리는 나라를 찾아 동맹을 맺는 것이 목표였다. 5개월가량 남하하던 선단은 1488년 1월 6일에 아프리카 남서부 해양에서 큰 폭풍을 만났다.[56] 2주 넘게 표류하던 배는 간신히 폭풍을 피해 항해를 이어갔으나 30일 넘게 육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디아스는 동북 방향으로 기수를 잡아 아프리카 남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3월 12일에 보에스만강 하구에 정박하여 휴식을 취한 뒤, 디아스는 계속 항해하여 인도로 가기를 원했으나, 폭풍에 지친 선원과 지휘관들이 귀국을 종용하며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다. 귀국길에 오른 선단은 5월경 '폭풍의 곶'을 발견하였고,[57] 1488년 12월에 리스본에 귀항하였다. 총 항해 일수는 16개월 17일이었으며, 디아스가 이름 지은 '폭풍의 곶'은 주앙 2세에 의해 '희망봉'이라 재명명되었다.[58] 이 항해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5. 2. 희망봉 발견의 의의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58] 주앙 2세는 항해왕자 엔히크가 사망한 1460년 이후 지지부진했던 아프리카 서안 탐험을 재개하여 왕실 수입을 늘리고,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그의 지원 아래, 1487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이끄는 선단이 리스본을 출발, 1488년 1월 남서부 해양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디아스는 동북방향으로 기수를 잡아 아프리카 남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갔고, 1488년 3월 12일에 보에스만강 하구에 정박했다. 디아스는 계속 항해하여 인도로 가기를 원했으나, 선원들의 반대로 귀국길에 올랐다. 5월경 '폭풍의 곶'을 발견했고,[57] 1488년 12월에 리스본에 귀항하였다. 총 항해 일수는 16개월 17일이었다. 디아스가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은 곳을 주앙 2세는 '희망봉'이라고 다시 이름 지었다.[58]
주앙 2세의 시대에 이루어진 주요 탐험 업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481년 | 나이지리아에 상조르제 요새 건립 (by 디오구 데 아삼) |
1482년 | 콩고강 발견 (by 디오구 캉) |
1484년 | 산타마리아 곶 탐험 (by 디오구 캉) |
1485년 | 케이프 크로스 탐험 (by 디오구 캉) |
1488년 | 희망봉 발견 (by 바르톨로뮤 디아스)[53] |
1493년 | 상투메 섬과 프린시페 섬에 정착 시작 (by 알바루 카민하)[54] |
5. 3.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3년 3월,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항[60][61][62]한 직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다. 스페인이 지원한 콜럼버스가 항해를 통해 몇몇 섬을 발견했는데, 그 섬들은 1479년에 양국간에 체결된 알카소바스 조약[63]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었다.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르면 카나리아 제도와 보르도자 곶의 남쪽 바다, 북위 약 26도 선상 지평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스페인, 남쪽은 포르투갈에게 영토 소유권이 있었다. 콜럼버스가 1차 항해에서 발견한 섬들이 북위 26도 남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조약에 의거하면 포르투갈 영토에 속했다. 주앙 2세는 이를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스페인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쟁이 격렬해지자 양국은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 3일 '아조레스 제도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100 레구아(서경 38도) 떨어진 지점의 자오선을 분기점으로 하여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토로 한다'는 칙서를 발표하였다.[64]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 중재안에 불복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섬들은 알카소바스 조약(1479년)상으로 볼 때 자신들의 영토인데도 스페인에게 유리한 일방적인 중재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데르 6세가 스페인 태생으로[65] 자신의 지지 기반이자 조국인 스페인에 유리한 결정을 내린것으로 보았다.[61]
포르투갈은 교황청과 무관하게 양자간에 재협상을 요구하나[66] 스페인이 불응하였고, 포르투갈은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양국은 직접 협상을 시작하였고 1494년 6월에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370 레구아(서경 약 46도 30분) 떨어진 지점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는데 합의하였다. 조약이 최종적으로 서명, 발표된 도시가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 이기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고 하게 되었고,[66] 이때 조약 원본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67][61]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중재안에 반발하여 양국간에 재협상이 벌어진것에 대해 불쾌하였으나 침묵하였다.[68] 아비뇽 유수(1309-1377)와 서구교회 대분열(1378-1417)등으로 교황권이 많이 추락한 시점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1506년이 되어서야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승인을 받았다.
새로운 기준선인 서경 46도 30분이 현 브라질의 상파울루 지점을 지나게 됨으로써, 1500년 4월 22일에 포르투갈 탐험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69]에 의해 발견된 브라질은 이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나머지 남미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서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데 반하여 브라질 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70][71] 16세기 후반에 뒤늦게 대서양을 통한 신대륙 탐사와 신항로 개척에 뛰어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은 이 조약을 무시하였으며,[72] 1580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 의하여 포르투갈이 합병되는 바람에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6. 콜럼버스와의 관계
1474년,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천문학자겸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1397~1482)가 아폰수 5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서신의 내용은 지구 구형설에 입각하여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 제안과 지도였다. 이 제안은 여러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보류되었다.[73] 콜럼버스(1450-1506)는 뒤늦게 토스카넬리의 서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74]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75] 토스카넬리는 아폰수 5세에게 보냈던 서신과 지도의 복사본을 콜럼버스에게 보내면서[76] 탐험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1484년 콜럼버스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대서양 횡단' 인도향 신항로 개척 기획안을 주앙 2세에게 제출했으나 거절 당하였다.[77][78]
7. 유대인 정책
1492년 1월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스페인은 유대인을 추방하기 위해 같은 해 3월 알함브라 칙령을 선포했다.[81] 추방령이 떨어지자 스페인 내 유대인 공동체는 포르투갈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이주 허락을 요청했다. 주앙 2세는 유대인들이 상업, 금융, 법률 등에 경험과 지식이 많은 점을 국가 부흥에 활용하기 위해 조건부로 이들을 수용했다. 우선 600여 개에 달하는 부유한 유대인 가문의 영구 정착을 허용했다. 그 밖에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일정 액수를 받고 10개월간 임시 체류를 허가하고 해외 이주를 위한 배편을 주선해주기도 했다.[82]
주앙 2세는 의회 대표들의 요청에 따라 유대인의 의복 착용 제한 및 유대인 소유의 기독교 개종자 해방 등 여러 반유대인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국왕의 개인적인 태도는 실용적인 것으로, 그는 그들의 경제적 기여를 중시하고 부당한 괴롭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
1492년 가톨릭 군주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후, 주앙 2세는 유대인 1인당 8 크루자두를 받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포르투갈로 입국시키는 것을 허가했지만 8개월 이상 체류는 허용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에 입국한 약 2만 가구 중, 가장 부유한 카스티야 유대인 가정 600가구만이 영주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지정된 기간 내에 국가를 떠날 수 없었던 유대인들(대부분 빈곤으로 인한 경우)은 노예로 전락했으며, 주앙 2세의 후계자 마누엘 1세의 통치 때까지 해방되지 않았다. 노예가 된 카스티야 유대인들의 많은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빼앗겨 아프리카의 상투메 섬으로 추방되어 기독교인으로 양육되고 식민지 개척자로 복무하도록 했다.
8. 결혼과 자녀
주앙 2세는 1471년에 사촌인 레오노르(1458~1525)와 결혼하였다.[83] 레오노르는 부왕 아폰수 5세의 동생인 페르난두(비제우 공작)의 딸이다. 1475년에 아폰수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아라곤 페르난도 2세의 장녀 이사벨과 결혼 후 얼마 안된 1491년 7월에 낙마사고를 당하여 외동아들이었던 아폰수 왕세자가 16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주앙 2세는 두명의 정부를 통해 2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1491년에 발생한 왕세자 아폰수의 죽음은 주앙 2세에게 커다란 슬픔이었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사생아인 조르제를 교황의 승인하에 적자로 만들어 왕국을 물려줄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그 이유는 사촌이자 왕비의 남동생인 마누엘은 군주로서 자질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왕비는 자신의 동생 이외에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는 것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다.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에 자신(주앙 2세)이 죽은 후에 정통성 시비로 인해 국론이 분열될 것이 분명하였다.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마누엘을 후계로 정하였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레오노르 (1458년 5월 2일 – 1525년 11월 17일; 1471년 1월 결혼) | |||
아폰수 왕자 | 1475년 5월 18일 | 1491년 7월 13일 | 포르투갈 왕자. 승마 사고로 사망. 왕자의 요절로 인해 왕위는 마누엘이 계승. |
사산아 | 1483년 | 1483년 | 1483년에 태어난 사산아. |
멘돈사의 아나 (c. 1460년-?) | |||
조르제 | 1481년 8월 21일 | 1550년 7월 22일 | 코임브라 공작. |
9. 평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에서 언급된 "완벽한 왕자"라는 별칭은 주앙 2세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 주앙 2세는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군주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당대 최고의 유럽 군주 중 한 명으로 존경받았으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는 그를 종종 El Hombrees (그 남자)라고 불렀다.[21]
이탈리아 학자 폴리치아노는 주앙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깊은 경의를 표했다.
: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당신께 감사를 표합니다. 당신의 신과 같은 공적 덕분에 이 시대는 이제 고대 시대와 모든 고전 시대와 과감히 경쟁하고 있습니다.
폴리치아노는 주앙 2세의 업적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해와 정복에 관한 주앙 2세의 업적을 기록하는 서사시를 쓰겠다고 제안했다. 국왕은 1491년 10월 23일 자 편지에서 긍정적으로 답변했지만, 의뢰를 연기했다.[22]
1495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한 주앙 2세는 정력적이고 패기에 넘치는 명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Invention of Glory: Afonso V and the Pastrana Tapestries
https://www.nga.gov/[...]
[2]
서적
¡Santiago y cierra, España!
https://www.google.c[...]
La Esfera de los Libros
[3]
서적
Isabella: the Warrior Queen
https://www.google.c[...]
Anchor Books
[4]
서적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8
https://books.google[...]
Macmillan
1959
[5]
서적
La "imcomparable" Isabel la Catolica
Encuentro Ediciones
[6]
서적
Abrégé chronologique de l'histoire d'Espagne
https://archive.org/[...]
Duchesne
[7]
간행물
San Juan de los Reyes y la batalla de Toro
http://dialnet.uniri[...]
[8]
간행물
Fernando el Católico, el mejor rey de España
https://web.archive.[...]
[9]
서적
La guerra civil Castellana y el enfrentamiento con Portugal (1475–1479)
http://www.cervantes[...]
[10]
간행물
San Juan de los reyes: espacio funerário y aposento régio
http://dialnet.uniri[...]
[11]
웹사이트
Portugal
http://www.newadvent[...]
Newadvent.org
2014-08-26
[12]
서적
(서적 제목 없음)
[13]
서적
(서적 제목 없음)
[14]
학술지
The Discovery of Brazil: Accidental or Intentional?
[15]
학술지
The Supposed Discovery of South America before 1488, and Critical Methods of the Historians of Geographical Discovery
https://zenodo.org/r[...]
[16]
서적
Columbus and the Portuguese Voyages in the Columbian Sources
https://books.google[...]
UC Biblioteca Geral 1
2010-11-17
[17]
학술지
How Columbus Encountered America
https://www.jstor.or[...]
[18]
서적
The Christopher Columbus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Springer
[19]
서적
Christopher Columbus and the Enterprise of the Indies: A Brief History with Documents
https://books.google[...]
Springer
[20]
웹사이트
King John II (1455–1495)
http://www.conventoc[...]
2024-06-23
[21]
서적
Playing the king: Lope de Vega and the limits of conformity
Tamesis
[22]
서적
Portugal e os Estrangeiros
https://archive.org/[...]
Livraria de A.M.Pereira
[23]
백과사전
Afonso V, King of Portugal
[24]
백과사전
Pedro, 1o duque de Coimbra
[25]
서적
The Wreck of Catalonia: Civil War in the Fifteenth Centu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6]
서적
(서적 제목 없음)
[27]
백과사전
Leonora of Aragon (1405–1445)
https://www.encyclop[...]
Gale Research
2018-07-11
[28]
서적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29]
문서
Testimonial of the divorce ruling between Prince Henry and the infanta Blanche
Collection of unedited documents on the history of Spain
[30]
서적
Edad Moderna: Auge del Imperio, 1474-1598
Editorial Critica
[31]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32]
서적
스페인사
까치글방
[33]
서적
Isabel of Castile and the making of the Spanish nation, 1451-1504.
[34]
백과사전
엔리케 4세 [Enrique IV]
[네이버 지식백과]
[35]
문서
토로스 데 귀산도(Toros de Guisando) 협정
[36]
서적
Isabel of Castile
The Knickerbocker Press
1915
[37]
서적
여왕의 시대
미래의 창
2011-05-25
[38]
서적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volume 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
[39]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40]
서적
Decada IV, Book XXXI, Chapters VIII and IX
[41]
서적
Decada IV, book XXXII, chapter III
[42]
서적
Portugueses en la frontera de Granada
2000
[43]
서적
Chronica de El-Rei D. Affonso V, 3rd book, chapter CXCIV
[44]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45]
웹사이트
브라간사 왕가
[네이버 지식백과 링크 생략]
[46]
서적
A History of Portugal
CUP Archives
[47]
웹사이트
Treaty of Alcáçovas
[영문 위키백과 링크 생략]
[48]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49]
문서
브라간사 공작 참수 사건 배경
[50]
웹사이트
Portugal
"https://www.newadve[...]
2014-08-26
[51]
서적
Monumenta Henricina, vol. V
[52]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53]
서적
A History of Portugal and the Portugal Empire, Volume 2: The Portuguese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54]
문서
상투메 프린시페 설명
[55]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탐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7-01-06
[56]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탐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7-01-06
[57]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탐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7-01-06
[58]
웹사이트
희망봉
https://terms.naver.[...]
2013-10-31
[59]
문서
아폰소 왕세자 사망 사건
[60]
문서
콜럼버스의 리스본 방문
[61]
서적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 창
[62]
서적
Mutiny and Its Bounty: Leadership Lessons from the Age of Discovery
Yale University Press
2013
[63]
문서
알카소바스 조약 설명
[64]
서적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65]
웹사이트
옥스퍼드 교황사전
https://100.daum.net[...]
1431-01-01
[66]
서적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67]
웹사이트
토르데시야스 조약문
https://terms.naver.[...]
[68]
웹사이트
토르데시야스 조약
[네이버 지식백과 링크 생략]
2014-12-22
[69]
서적
대양시대 개막
지명출판사
2012-05-10
[70]
서적
라틴 아메리카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71]
문서
포르투갈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용어로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72]
서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73]
문서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후 오스만의 서진이 계속되자 교황 갈리스토 3세(재위 1455~58)가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다. 백년전쟁(1337~1453)이 종료된 직후이기도 하고 과거의 선례를 근거로 유럽의 군주들 대부분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오직 아폰수 5세만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458년에 교황이 사망하자 원정이 취소되었다. 그러자 아폰수 5세는 군대를 이끌고 1458년부터 1471년까지 수차례 아프리카 원정에 열중하였다. 그후 1474년 12월 11일에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엘리케 4세의 딸과 혼인한후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요구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위 계승전쟁은 1479년에 포르투갈의 패배로 종료되었고 알카소바스 조약을 맺은 후 크게 실망하며 은둔하다가 1481년 8월에 사망하였다. 아폰수 4세는 아프리카 원정, 카스티야의 왕위계승,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 탐사에 관심을 두었을 뿐 토스카넬리의 제안에는 무심하였다.
[74]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75]
웹인용
[지혜의 향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지상낙원을 찾아서(주경철 교수) - YouTube
https://www.youtube.[...]
2020-07-26
[76]
서적
지리 이야기
한올
[77]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78]
문서
콜럼버스의 계획에 대해 전문가로 구성된 검토위원회가 열렸고 콜럼버스도 참가하여 토론을 벌였다. 토론내용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를 추정해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콜럼버스는 지구의 둘레를 너무 작게 보았기에 그가 계산한 항해거리가 너무 짧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 공방이 있었을것 같다. 또한 포르투갈은 1482년에 콩고강까지 탐사가 이미 이루어져 아프리카 남단 경유에 대한 많은 항해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밖에도 바람, 조류등 항해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대서양 횡단보다는 아프리카 남단을 경유하는 경로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당대에는 추가 보급없이 연속 항해 가능한 일수가 약 6~9주정도였다. 냉장기술이 없었으므로 음식물과 물의 중간 보급은 절대적인 요소에 속했다. 또한 연안 항해는 선박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 신속히 육지로 이동할 수 있는 장점등이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콜럼버스의 기획은 거부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79]
논문
The Discovery of Brazil: Accidental or Intentional?
1936
[80]
논문
The Supposed Discovery of South America before 1488, and Critical Methods of the Historians of Geographical Discovery
1897
[81]
간행물
알함브라 칙령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82]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83]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